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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요수(난하)

민족영웅 코리아대칸

주소복사 조회 796 12.01.18 10:23 신고신고

지나문헌들,"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

「고구려(高句麗),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 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 연. 제. 노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蠡」三國史記 列傳 第6 崔致遠傳

신라의 유학생 최치원이 당나라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고 있을 때 당나라 관리에게 했던 말이다.

신라 최치원이 괜히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고구려.백제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의 나라들로 단군조선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해야 한다는 다물이 국시였다. 다물은 고구려의 말이고, 다물이 다무로=>담우로->담로로 변음화된 '담로'는 백제의 국시였다.

그래서 고구려는 만주지역에 해당하는 진조선 지역을 기반으로, 백제는 마조선 지역을 기반으로 지나세력에게 빼앗긴 번조선 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나 동해안 지역-춘추 전국시대의 연.제.노.오.월 위치

번조선 지역은 요하 건너 지나 동해안 지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여의 주인을 자처하는 고구려와 백제는 번조선 지역에서 충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는 지나문헌들의 기록들이 단적으로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고대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요동.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단군조선의 최저 마지노선으로써 지나세력과 접하는 서쪽 경계지역이였던 요수(난하)였다.

강단사학에서 일제의 식민사학계로부터 엄청난 비하.매도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단군조선사를 반도식민사관으로부터 탈피하여 철저히 지나문헌기록들에 의거하여 난하지역까지 전개시킨 윤내현 교수(전남 해남출신.단국대 사학과 교수.부총장)가 요동.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에 따르면,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과 [삼국지(三國志)]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고구려는 요동으로부터 동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지금의 요동에 있었으므로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요동으로부터 서쪽으로 1,000리 떨어진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곳이 고조선과 진의 국경이었던 것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대의 요동은 갈석산(碣石山) 지역이었다. ‘사기’의 진시황본기·효무본기(孝武本紀) 등에 등장하는 갈석산의 위치는 난하 하류 동부 유역에 있는 지금의 갈석산과 일치한다. 난하 하류 유역이 고대의 요동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고대의 요동은 지금보다 1,000리 서쪽-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고대의 요동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사기’ 몽념열전(蒙恬列傳)에는 ‘국경에 쌓은 만리장성이 임조(臨조)에서 시작되어 요동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진서’(晉書) 당빈전(唐彬傳)에는 ‘만리장성을 복구했는데 갈석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만리장성의 끝 부분이 요동의 갈석산 지역이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십구사략통고’의 지도에는 발해의 서북부에 요수(遼水)가 그려져 있고 만리장성이 서쪽으로부터 이를 관통하여 요동에 이른 것으로 되어 있다. [회남자(淮南子)]추형훈(墜形訓)에는 요수는 갈석산에서 나와 요동의 서남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설명하였다. 갈석산을 끼고 흐르는 큰 강은 난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다는 기록은 난하 동쪽지역을 모두 차지했다는 소리이고,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는 소리는 난하 서쪽 지역을 모두 차지했다는 소리가 된다.

 

http://www.kookminnews.com/news/service/article/mess_01.asp?P_Index=2889&f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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